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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기억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가짜 기억의 형성과 법 심리학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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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가짜 기억의 형성과 법 심리학적 함의

우리는 기억을 진실의 기록이라 믿는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짜 기억(False Memory)'은 존재하지 않은 일을 실제처럼 기억하는 심리적 현상으로, 일상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큰 파장을 불러온다. 특히 법 심리학에서는 증언의 신뢰성, 피의자의 기억 왜곡, 허위 자백 등의 문제와 직결되며, 실질적인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본 글에서는 가짜 기억의 심리적 형성과정을 해부하고, 그 현상이 법률 시스템에서 갖는 의미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분석한다. 또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심문 기법의 변화와 제도적 보완의 필요성까지 폭넓게 다룬다.

기억의 함정, 존재하지 않은 진실의 탄생

기억은 객관적 사실의 저장소가 아니라, 주관적 해석과 감정이 개입된 재구성의 산물이다. 인간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으며, 그때의 감정 상태, 주변인의 반응, 질문 방식, 시간의 경과 등에 따라 기억은 조작되거나 심지어 ‘생성’되기도 한다. 이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마치 진짜처럼 기억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가짜 기억(False Memory)’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20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를 통해 학계에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녀는 실험을 통해 특정한 언어적 자극이나 암시가 참가자의 기억을 왜곡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이는 법정 증언의 신뢰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차가 멈췄다”고 질문하는 것과 “차가 급정거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가짜 기억은 특히 아동, 외상 경험자, 노인,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며, 이는 법률 시스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왜곡된 증언과 기억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나중에서야 DNA 검사나 증거의 재분석을 통해 무죄가 입증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가짜 기억은 단지 심리학적 흥미거리를 넘어, 사회 정의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기억 왜곡의 메커니즘과 법 심리학의 교차점

가짜 기억은 단순한 착각이나 건망증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 사회적, 인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심리학적으로, 기억은 세 단계—부호화(encoding), 저장(storage), 인출(retrieval)—로 나뉘는데, 이 과정 어디에서나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가짜 기억 형성 요인은 ‘암시(suggestion)’이다. 강압적이거나 유도적인 질문은 뇌에 새로운 기억의 조각을 심을 수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실제 기억처럼 정착된다. 이와 관련해 특히 아동 대상 수사에서 ‘유도 심문(suggestive questioning)’이 문제가 되는데, 어린이는 성인의 질문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정보의 간섭(interference)’이다. 사건 발생 이후 다른 사람의 이야기, 뉴스, 경찰의 진술 등이 원래의 기억을 덮어씌우면서, 기억의 내용이 바뀌게 된다. 예컨대 목격자가 사건 직후 뉴스를 통해 범인의 인상착의를 듣고, 본인의 기억까지 그 정보에 맞춰 수정되는 것이다. 법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가짜 기억 현상이 실제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허위 자백(false confession)’이다. 장시간의 심문, 신체적 압박,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면 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 죄를 사실로 ‘기억’하고 자백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심리는 특히 정신 질환이 있거나 지적 능력이 낮은 이들에게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미국의 ‘Innocence Project’에 따르면, 잘못된 기억에 기반한 목격자 진술과 허위 자백은 오판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으며, 이는 실질적인 무죄 추정의 원칙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짜 기억에 대한 제도적 경계와 법 심리학의 과제

가짜 기억의 존재는 법률 시스템에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기억의 증거력’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기억 자체가 왜곡되었다면 과연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처럼 법과 심리의 경계에 위치한 문제는, 단순한 수사기술의 개선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먼저 제도적 차원에서는 심문 절차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유도 질문을 줄이고,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질문 방식(open-ended questioning)을 적용해야 하며, 아동이나 인지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할 경우 반드시 전문가가 동석해야 한다. 또한 모든 심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진술의 일관성과 자기 모순 여부를 세밀하게 검토하는 절차도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 법원과 수사기관 관계자에 대한 ‘기억의 과학’ 교육이 필수화되어야 한다. 단순히 진술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된 과정과 심리적 환경을 함께 고려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증인의 말 한 마디가 판결을 좌우할 수 있는 만큼, 그 기억이 만들어진 방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공정한 판단이 어려울 수 있다. 셋째, 법 심리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심리학적 자문을 제공하는 제도적 통로가 마련되어야 하며, 가짜 기억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 평가 시스템도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법정 심리학 전문가’가 증거의 심리적 타당성을 분석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이러한 접근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결국 가짜 기억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정의와 법적 절차의 공정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다. 우리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억에 의존해왔지만, 이제는 그 기억조차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때다. 심리학의 통찰이 법의 판단을 더욱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 중심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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